사상 최대 실적 발표날, 권오현 부회장 용퇴


사상 최대 실적 발표날, 권오현 부회장 용퇴

“경영진, 비상한 각오로 쇄신을”

반도체 이후 미래 먹거리 큰 과제

적임자 찾기 위해 후배에 길 터줘

권오현(사진)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난다고 13일 밝혔다.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분기 실적을 발표한 직후다. 이날 오전 권 부회장은 보도자료를 통해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까지만 삼성전자 이사회 이사와 의장직을 수행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겸직하고 있는 부품부문 총괄직과 삼성디스플레이 대표이사직도 내려놓기로 했다. 직접 밝힌 사퇴의 배경은 ‘경영 쇄신의 필요성’이다. 권 부회장은 “사퇴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해 왔던 것이고,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급격히 변하고 있는 정보기술(IT) 산업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이 바로 후배 경영진이 나서 비상한 각오로 경영을 쇄신해 새 출발을 할 때라고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재계는 크게 술렁였다. 권 부회장이 보여 준 경영 성과를 고려하면 ‘굳이 지금 물러나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온다. 권 부회장이 반도체사업부를 이끌기 시작한 2008년 이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은 빠르게 위상을 강화해 왔다. 지난 2분기엔 반도체 업계의 제왕 인텔을 제치고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로 우뚝 섰다. 회사 상황이 어수선한 것도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의문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권 부회장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구속된 이재용 부회장을 대신해 삼성전자의 수장 역할을 맡아 왔다. 지난 6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의 재계 총수 회동, 7월 문재인 대통령의 재계 호프 미팅에도 삼성전자를 대표해 참석했다.

권오현 부회장 “내년 3월까지만 업무” … 부드러운 업무승계 본보기 될 듯

이 때문에 일각에선 “총수 부재의 상황을 떠안는 데 부담을 느낀 게 아니냐”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라는 정권의 압박에 반발하는 의미가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온다.

재계는 그가 삼성전자의 내부 혁신을 위해 용퇴했다는 쪽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삼성전자를 둘러싼 외부 경영환경 변화가 이런 결정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급물살 속에서 ‘반도체 다음 먹거리’를 찾는 것이 삼성전자의 큰 과제다. 하지만 지난해 말 그룹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이후 장기 성장전략을 짜는 작업은 사실상 멈춘 상태다. 이병태 KAIST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전자 각 사업부문의 시너지와 먼 미래를 고민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재개해야 한다는 게 권 부회장의 판단이었을 것”이라며 “적임자를 찾기 위해 용퇴했을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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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조직도

최근 2~3년간 그룹의 인사가 정체되며 세대 교체가 없었던 것도 권 부회장이 “더는 미룰 수 없다”고 결심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2년간 인사 폭을 최소화했다. 지난해엔 최순실 사태로 아예 임원 인사를 할 수 없었다. 권 부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권 부회장은 젊은 친구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야 한다면서 인사 정체를 안타까워했다”며 “박수 칠 때 떠나자는 마음으로 실적 발표날 용단을 내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권 부회장이 임기 6개월을 남기고 사퇴의사를 밝히면서 삼성전자는 후임자를 물색하고 부드러운 인수인계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재계는 이런 승계 시스템이 새로운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GE 같은 미국 기업은 최고경영자가 퇴임 전 미리 후계자를 결정해 경영 공백과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례화돼 있다.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은 “그동안 한국은 오너가 있는 기업은 오너의 의사에 따라, 금융권 및 공기업은 정권의 입김에 따라 최고경영진이 결정돼 왔기 때문에 후임이 누구인지 미리 알 수도 없었고, 갑작스러운 경영진 교체로 인한 혼란을 피할 수도 없었다”며 “권 부회장의 사퇴 이후 삼성전자의 행보가 새로운 경영 승계 시스템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미진·박태희·손해용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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